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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CLeaF) 36호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2)

기독법률가회 0 1293

            CLF 클립(CLeaF) 36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feat. 이반 일리치의 죽음) (2)

                                                        우미연 변호사*

                     

*이 글은 2023. 3. 9. CLF 비전센터에서 온·오프라인으로 진행된 CLF 독서모임(대상도서 :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필자가 책을 읽고 나눈 일부 소감을 기반으로 필자가 이를 수정, 보완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3회에 걸쳐 나누어 싣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3. 죽음의 한 가운데에 살고 있었던 이반 일리치​

​ 이반 일리치는 평범해 보이는(특별히 악해 보이지 않는), 아니 오히려 고상하고 때로는 겸손하고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명망 높은 법조인이었다. 일에 관하여는 자신의 맡은 바 책무를 공정하고 성실하게 수행하였고, 권한을 남용하지 않았으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정중하게 대했다. 언제나 친절하고 예의 바르면서도 재미있고 쾌활하며 카드 게임과 음주 파티를 즐기는 사교가였다. 대부분의 상류사회 사람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좋은 가문 출신의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진 매력적인 여성을 만나 결혼했다. 한 아내의 남편이자 딸과 아들, 둘의 아빠였고, 업무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예심판사, 검사보, 검사, 판사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지위와 평판을 두루 갖춘 훌륭한 사람이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질병으로 앓다가 45세라는 이른 나이에 숨진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선량한 사람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죽기 전 '자신이 살면서 추구해 온 모든 게 거짓이고 기만이었으며, 자신은 거꾸로 가는 방향의 열차를 탄 것처럼 살아왔다'고 고백하며 괴로워한 것일까. 톨스토이 작가는 이렇듯 그의 단순하고 평범한 삶이 그래서 끔찍했다고 글의 서두에서 이미 밝혔다. 이반 일리치의 품위 있고 고상한 행동, 평범하면서도 남부러울 것 없는 그의 삶, 그 보여지는 모습의 이면에는 오래전부터 뿌리 깊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는 스스로 전혀 깨닫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 이반 일리치는 법률학교 재학시절 본인이 생각해도 추악한 행동, 스스로를 혐오할 수밖에 없는 그런 행동을 저지른 적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른 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행동을 저지르며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생각을 바꿔 더 이상 괴로운 기억을 되살리지 않기로 하였다. 또한, 그는 청년 시절 은근한 풍류와 방탕을 즐기기도 하였으나 그가 속해있는 고위층 집단에서는 특별히 문제 되지 않았기에 금세 익숙하게 생각했다. 이후 대부분의 상류사회 사람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좋은 가문 출신의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진 매력적인 여성을 만나 결혼했다. 이러한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즐겁고 고상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삶의 모습이라고,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상류사회가 인정했던 조건이 좋고 이상적인 두 남녀의 결혼이었으나, 그 둘의 결혼생활은 순조롭지 않았다. 아내의 임신과 출산 이후 둘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그럴수록 아내의 질투, 잔소리, 불평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반 일리치는 공무에 열중하였다. 일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도피처였고 아내가 간섭할 수 없는 그만의 독립된 세계였다. 일에 몰두할수록 그는 검사보, 검사, 판사로 승진을 하며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높여갔으며, 결혼생활에서는 그저 집밥, 집안 살림, 잠자리 등 아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만을 취하고 즐거움과 기쁨은 그 외에서 찾았다. 그에게 결혼은 사회통념이 정해놓은 형식과 품위를 지키기 위해 유지하는 것에 불과했다. 생활비가 급여를 상회하면서 점점 더 빚에 허덕였고, 그만큼 아내와는 사이가 더 멀어졌으며, 그는 오직 급여가 높은 자리로 이직하기만을 원했다. 그러던 중 직장동료였던 지인의 급격한 부상 덕분인지 대대적인 인사이동에 따라 두 단계나 높은 등급으로 17년 만에 승진을 하게 된다. 그는 높은 연봉과 이사비용까지 받아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잠시 아내와의 관계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직장에서 거둔 성공과 아내와의 관계회복은 그를 즐겁게 했고, 가족들보다 먼저 임지로 내려온 이반 일리치는 새로 구한 멋진 집을 단장하면서 부자와 명문가처럼 보이기 위해 온갖 화려한 물건을 구비했다. 가족들은 풍족한 생활을 누렸고, 그는 편안하고 유쾌하며 품위 있게 생활했다. 법원에 출근해서는 쉽게, 고상하게, 노련하게 업무를 처리했고 공사 구분 역시 확실했다. 휴식시간에는 동료들과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면서 정치나 일상적인 문제들, 카드게임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언제나 인사이동이었다. 집에서는 조촐한 만찬 모임을 열어 명망이 높은 사교계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춤을 추거나 카드게임을 즐겼다. 공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고 사교 활동을 하며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았다. 그들은 최고 사교계와 교류했으며 고위층 인사들과 젊은이들이 그의 집에 드나들었다. 그와 아내, 그리고 딸은 동일한 시각으로 시시껄렁한 지인 나부랭이들(여러 친구, 친척들)은 떼어내 버렸고 이제 오로지 최상층 사람들만이 드나들었다. 

 모든 것이 좋았고, 모든 것이 변함없이 흘러가던 어느 날, 이반 일리치는 옆구리에 거북한 느낌, 묵직해진 느낌을 시작으로 점점 통증을 호소했다. 점점 병세가 아주 빠르게 악화되었고, 부부관계 역시 악화되었다. 그는 예민해졌고 괴팍하게 굴었고 온갖 트집을 잡았다. 아내는 남편의 끔찍한 성격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불쌍하게 생각했고, 그런 생각이 들면 들수록 남편이 미워졌다. 남편이 어서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지만, 그가 죽으면 그의 봉급도 함께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으니 더욱더 남편에게 화가 치밀었다. 남편의 죽음조차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자기 자신이 끔찍할 정도로 불행하다고 느꼈다. 아내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숨겼고, 그녀가 이처럼 자신의 분노를 숨기는 모습은 그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 그리고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며 파멸로 몰고 가는 사람들에게 화를 쏟아부었다. 이러한 분노가 자기를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좀처럼 참을 수 없었다. 아주 작은 일에도 벌컥벌컥 화를 냈다. 자신의 삶에 스며든 독이 다른 사람들에게 퍼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그는 이러한 생각과 더불어 육체적인 고통과 공포까지 끌어안은 채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 통증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이면 법원으로 출근해서 서류를 작성해야 했고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24시간을 꼼짝없이 집안에 틀어박혀 매분 매초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그렇게 파멸의 벼랑 끝에서 자신을 이해해주고 불쌍히 여겨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외롭게 살아가야만 했다. 죽음과 마주 보고 있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죽음을 바라보며 차갑게 식어가는 자신을 느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건강과 힘, 그리고 삶의 활력을 볼 때마다 그는 속이 상하고 화가 났다.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거짓이었다. 모두가 묵인하고 있는 거짓말, 그는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플 뿐이다, 그러니 잠자코 치료를 받으면 좋아질 거라는 그 거짓말이 그를 괴롭혔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하든 병에서 회복될 수 없으며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고통과 죽음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사람들의 거짓말은 그를 고문했다. 그가 보기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무시무시하고 장엄한, 무섭고 끔찍한 이 죽음이라는 의식을 그저 어쩌다가 발생한 불쾌한 사건, 품위가 떨어지는 일 정도로 격하시켰다. 그가 평생토록 지키려 애썼던 품위라는 게 고작 그런 것이었다. 거짓말 외에, 아니 거짓말 때문에 그를 고통스럽게 했던 또 한 가지는 그 누구도 그가 바라는 만큼 그를 가엾게 여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병든 어린아이 대하듯 마냥 불쌍히 여겨주기를, 아이를 달래며 보살피듯 다독여 주고 입을 맞춰 주고 자기를 위해 울어주기를 바랐다. 꺼이꺼이 울고 싶었고 그런 자신을 누군가 달래 주고 같이 울어주기를 바랐으나 법원 동료가 찾아오자 그는 소리 내어 울거나 다독임을 구하는 대신 진지하고 근엄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상소심 판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고집했다. 바로 이 거짓, 주변 사람들과 그 자신의 거짓이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나날들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4. 죽음의 자리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한 이반 일리치​

​ 이반 일리치는 지독히도 외로웠고 지독히도 괴로웠다. 무엇이 그를 외롭고 괴롭게 만들었을까. 지독히도 잔인한 말이겠지만, 이 모든 것은 어쩌면 그가 살아온 인생에서의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다. 

​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도덕성과 가치관, 행동양식에 동화되어갔다. 법률학교 재학시절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던 파렴치한 행동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던져버렸고, 화류계 부인들과의 염문과 방탕 역시 하나의 사교계 문화 정도로 가벼이 여기게 되었다. 사랑과 희생, 헌신의 결단은 전혀 없이, 상류사회에서 인정할만한 좋은 가문에 재산이 있는 매력적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결혼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와 아내는 부자인 척, 명문가인 척 자랑하고 보여주기 위한 허영과 사치로 집을 가득 채웠고, 승진을 거듭하면 할수록 최상층 부류의 사람들과만 어울리며 그 외의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는 끊어버렸다. 그와 아내는 자신의 딸이 부유한 권력층 자제와 결혼할 수 있도록 혼숙 계획을 세우기까지 한다. 그는 그렇게 사치와 향락을 즐기며 명예와 권력과 탐욕을 쫓아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어느덧 그들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 그리고 그는 누군가의 슬픔에, 괴로움에, 울부짖음에, 고통에는 전혀 무관하게 살았다. 심지어는 가족의 일에도 말이다. 소설 내용 중 아주 잠깐 한두 문장 정도에 그치는 짧은 서술이 있었다. '이반 일리치와 아내 사이에 두 아이가 죽었고, 나중에 또 한 아이가 죽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대목에서 이반 일리치는 '아이가 죽었다'는 아주 건조한 사실관계를 나열할 뿐 이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 자신의 욱신거리는 통증, 죽음의 공포에 대해서는 그토록 자세하게 묘사하면서도, 타인의 죽음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이 자신의 아이의 죽음이더라도 말이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슬픔과 죄책감을 감히 짐작이라도 했을까. 그는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잃고 지옥 속에서 고통받으며 몸부림치던 그때에 그 아내와 함께 있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를 안아주지 않았을 것이고, 함께 울어주지 않았을 것이고, 위로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씩이나 아이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그 죽음의 사자를 끌어안고 외롭고 괴롭게 불면의 시간을 보냈을 아내에게 이반 일리치는 보호자가 아니었고 남편이 아니었고 오히려 원수와도 같았을 것이다. 자신과의 잠자리는 즐기지만 이후 생명의 잉태에 관해서는 무심한 남편의 태도에, 여자로서는 비참함을 느끼고 아내로서는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후에도 이반 일리치는 다시금 아이를 잃은 아내와 동생을 잃은 딸을 또다시 버려두었다. 아내와 딸에게 그는 정서적으로 어떠한 울타리도 되어주지 못했다. 그는 타인에게는 물론 자신의 가족의 아픔에조차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질병과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진심으로 걱정해주거나 불쌍히 여겨주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환멸을 느꼈지만, 사실은 그들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죽은 소식을 들은 직장 동료들이 그의 자리를 대신하여 승진할 사람이 누구인지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장례식을 찾은 지인이 그가 죽은 슬픔보다는 장례식 예절에 맞는 행동이 무언지 생각하는 것처럼, 통증과 공포로 괴로워하는 그에게 의사가 아무런 공감 없이 근엄한 모습으로 형식적인 진료를 하는 것처럼, 그 역시도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 또한, 그는 이기적으로,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을 의식하면서 거짓의 가면을 쓰며 살았다. 그는 아내와 수십 년간 갈등하고 싸우면서도 진정으로 아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내의 결핍이 무엇인지, 아내가 왜 자신에게 잔소리를 하고 화를 내고 불만을 말하는 것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아내의 마음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그저 겉으로 보이는 그 현상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회피하려고만 하였다. 아내의 마음을 살펴보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본인의 마음 역시 아내에서 솔직하게 나누려고 하지도 않았다. 상대방의 진실한 모습을 추구하지도,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거짓의 가면을 쓰고 살았고, 가면을 벗은 아내의 모습을 외면했다. 그저 일을 핑계로 늘 도망쳤을 뿐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를 알지도, 풀지도 못한 채, 사회통념이 정해놓은 형식과 품위를 지키기 위해 형식상 결혼관계를 유지했다. 아내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기에, 아내와 결혼하는 것이 이익이 되리라고 생각해서 결혼한 것이기에, 더이상 내게 즐거움과 안락함이 되지 않는다면 잠자리, 집밥, 집안 살림을 해주는 존재 정도로 치부하고 그 정도의 유익만을 누리며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사회적 평판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기적으로 아내를 이용했다. 그에게는 진정한 사랑의 관계, 용서와 화해와 연합을 일구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다. 아내와 딸에게마저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피상적으로 만나는 다른 관계에서는 오죽했을까. 그는 자신의 질병과 죽음에 대해서 누구도 진실하게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거짓에 괴로워했지만, 사실은 그들의 거짓된 모습이 늘 거짓 가면을 쓴 채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진실을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의 진실마저도 외면했다. 거짓된 가면을 벗고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마주할만한 용기도, 의지도 없었고, 그 방법도 찾지 않았다.​

​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질병과 죽음 앞에 서게 되자,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직시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의 타락한 도덕성과 가치관을 쫓아 살면서 부와 명예만을 추구하는 욕망 덩어리가 되었고,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기적으로 자신의 인생만을 꾸역꾸역 살아왔으며, 품위와 고상함으로 포장했으나 실상 그것이야말로 거짓과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결국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질병에 걸려 죽음을 마주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음의 자리 그 한 가운데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질병으로 인해 깨닫게 된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 우미연 변호사 : 법률사무소 우리. CLF 통일법센터 룩(LOOK : Lawyers Of One Korea)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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