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소식 > CLeaF
CLeaF

클립(CLeaF) 37호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3)

기독법률가회 0 1253

            CLF 클립(CLeaF) 37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feat. 이반 일리치의 죽음) (3)

                                                        우미연 변호사*

                     

*이 글은 2023. 3. 9. CLF 비전센터에서 온·오프라인으로 진행된 CLF 독서모임(대상도서 :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필자가 책을 읽고 나눈 일부 소감을 기반으로 필자가 이를 수정, 보완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3회에 걸쳐 나누어 싣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5. 죽음의 자리에 빛이 있었다​

​​

이반 일리치는 몸이 아프기 이전에 마음이 먼저 아팠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분출해 낸 부정적인 감정들은 육체적 질병 때문에 더욱 표출된 것뿐이지, 이미 그의 내면에 오랜 기간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못마땅함과 긴장과 소진과 미움과 분노와 증오는 그를 잠식하였고, 그의 마음은 그 자체로 지옥이었을 것이다. 가정에서부터도 그러했고, 끊임없이 포장하고 치장하고 보여주고 무언가 성과를 내야만 인정받는 사회생활에서는 더욱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어떤 관계에서도 온전한 평안과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못했던 것 같다. 누구로부터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던 것 같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받고 사랑받지 못했고, 그 역시 상대방의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지 못했다. 아내마저 도구적으로, 기능적으로, 계산적으로 이익을 취할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그가, 자식을 잃어도 아쉽거나 슬프거나 괴로워하지 않았던 그가, 어떻게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는 그 자신에게 이렇게 사랑에 대한 결핍과 갈증이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반 일리치에게 사랑을 느끼게 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하인 게라심이 있었고 어린 아들이 있었다. 

 건강을 잃고 질병 가운데 고통하던 이반 일리치를 진정으로 도와주고자 했던 이는 게라심 뿐이었다. 아무도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그의 처지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라심은 조금도 힘든 내색 없이 기꺼이, 편안하고 순박하게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 이반 일리치를 감동시켰다. 오직 단 한 사람, 게라심만이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를 가엾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오로지 게라심과 있을 때에만 마음이 편했다. 오직 게라심만이 그에게 그 어떤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게라심만이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으며, 다만 점차 쇠잔해 가는 나약한 주인을 가엾게 여기고 있었다. 

 그에게는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아들을 언제나 안쓰러워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아버지를 동정하듯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두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는 게라심 외에 자신을 이해하고 불쌍하게 생각해 주는 사람은 아들 한 명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사망하기 한 시간 전, 자신의 삶이 온통 거짓과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라도 삶의 방향을 되돌리고자 방법을 찾고 있을 때, 바로 그 아들이 다가와 자신의 손등에 키스를 하고 그 위에 눈물방울을 떨구며 자신을 위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들이 불쌍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온 얼굴에 눈물을 흘리던 아내를 보게 되자 아내도 안쓰러웠다. 

 게라심으로부터 받은 사랑, 아들에게 받은 사랑, 그 사랑이 결국 이반 일리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다. 자신의 삶이 죽음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구원의 방법을 찾아 헤맸으나 좀처럼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잘못된 방향을 향해 살아왔다는 것도 알았고, 자신의 삶이 거짓이고 기만이었다는 사실도 깨달았고, 이제라도 바로잡을 수 있고 바로잡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지만, 자신 안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때 그렇게 구원을 갈망하던 그에게, 흑암의 터널에 갇혀있던 그에게, 일방적인 사랑의 빛이 비추었다. 그토록 자신을 위해 울어줄 사람을 애타게 기다렸는데, 그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아들과 아내를 본 그는 그동안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감정을 느낀다. 그동안 분노와 원망과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던 그의 마음이, 긍휼함과 미안함과 배려와 용서 구함이라는 사랑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지 않는다고 원망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먼저 아들과 아내를 불쌍히 여기고 안쓰러워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나를 불쾌하고 불편하고 화나게 하는 이들을 향해 분노와 저주를 쏟아냈지만, 이제는 그들을 내가 힘들게 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을 갖고 용서를 구하고 싶어졌다. 이전에는 그토록 간사하고 얄밉게만 보였던 아내였는데, 이제는 자신을 위해 절망한 표정으로 눈물범벅이 된 채 서 있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그는 죽음이 있던 자리에서 빛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를 괴롭히던 죽음은 끝났다. 더 이상 죽음은 없었다.​

6. 죽음을 죽이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반 일리치는 어느 날 도배장이에게 커튼 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사다리 위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면서 창틀 손잡이에 옆구리를 부딪쳤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날 그 잠시의 사고로 인해 그는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다가 단 석 달만에 죽게 되었다. 그 순간이 없었다면 그는 자신이 달려가던 방향 그대로 죽음을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은 결국 그의 단순하고 평범한 삶을, 그래서 끔찍했던 그의 삶을 돌이킬 기회를 선사하였다. 그는 그날의 사고를 되뇌며 원망하고 후회했으나 결국은 감사히 여기며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깨닫고 얻었으니 말이다. 그는 아마도 '고난이 영광의 고지서'였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살아있었으나 죽은 사람이었다. 잘 사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몸도 마음도 영혼도 죽은 상태였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사랑받는 방법도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죽음의 자리를 향해 달려가면서도 깨닫지 못했고, 자신의 영혼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고, 다른 사람의 영혼을 죽게 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질병에 걸려 죽음을 고민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삶에 상당히 만족하면서, 자신이 꽤 고상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그 자신이 고백하듯이, 그렇게 스스로 그의 눈을 가려 삶과 죽음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물며 이반 일리치보다 덜 고상하고 덜 품위 있고 덜 좋은 사람인 것 같은 나는 어떠한가. 나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마음을 잠식하고 나를 병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쓴 거짓된 가면은 무엇인가, 나를 죽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외면한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은 무엇인가, 내가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이며 내가 사랑하지 못한 순간은 언제인가, 나는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는가 죽음을 죽이고 생명을 살고 있는가,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은 죽어 있는가 살아 있는가 고민해본다.

 그런 그에게 게라심과 아들은 사랑의 빛을 비춰준 생명의 통로였다. 그를 위해 온전한 헌신과 공감으로 지켜주는 사랑, 그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며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는 사랑, 그 사랑이 그를 살게 했고, 죽음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리고 이와 동일하게 그 헌신과 희생의 사랑, 용서와 긍휼의 사랑이 나 역시 살게 했다. 나는, 우리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사랑을 알고 있다. 그 사랑이 나를, 우리를 살게 했다. 신이 자신을 거역하고 배반한 피조물을 위해 스스로 죽은 사랑이다. 하나뿐인 아들을 대신 죽음의 자리로 내던진 사랑이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영원한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나라로 옮기신 사랑이다. 백번을 천 번을 잘못해도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기회 주시는 오래 참는 사랑이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의 몫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명징하다. 죽음을 죽이고 참 생명을 살아야 한다는 것. 사랑의 빚을 진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도 그 사랑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것. 죽음의 자리에 있는 이들이 죽음을 떨쳐내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 그렇게 사랑과 생명을 전하는 것. 그렇게 생령으로 살며 흙과 같은 존재가 생령이 될 수 있도록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게라심처럼 헌신하고 있나, 나는 누구와 함께 이반의 아들처럼 울고 있나, 나를 위해 헌신하고 함께 울었던 나의 게라심과 이반의 아들은 누구였나 생각해본다. 나와 우리 기독법률가회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게라심과 이반의 아들처럼, 사랑과 생명의 구원을 전하는 살아있는 참 생령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한다.


* 우미연 변호사 : 법률사무소 우리. CLF 통일법센터 룩(LOOK : Lawyers Of One Korea) 사무국장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