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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CLeaF) 47호 휴전 70년, 화해와 치유의 길을 찾아서

기독법률가회 0 1162

        CLF 클립(CLeaF) 47    

  

휴전 70, 화해와 치유의 길을 찾아서


* 예레미야 25:11, 12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예레미야 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다니엘 9: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 먼저 우리는 한국전쟁이 북한의 도발로 시작되긴 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북측이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미국의 대규모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개전 이후 19534월 말까지 미군은 448천 톤의 폭탄과 3,627만여 리터의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북한 전역에 118발의 폭탄이 떨어진 셈이다. 또 평양에만 4287백 발의 폭탄이 투하되었는데, 당시 평양 인구가 40만여 명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시민 한 사람당 1발을 안기고도 남는 분량이다. ... 당시 미국 태평양 지역 사령관이었던 르메이 대장이 서 있던 것은 남김없이 쓰러졌다. 탈 수 있는 것은 남김없이 타버렸다. 남은 것은 바위와 돌뿐이다. 북한은 이제 석기시대로 돌아갔다.”고 선언했을 정도이다.

 

... 물론 전쟁으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 북한의 공식 인구자료에 의하면 1949년과 1953년 사이에 약 113만의 인구가 감소하였다. 이 수치는 1949년 북한 인구 9622천 명의 12%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구의 자연증가율을 고려할 때 실제 전쟁 사망자 수는 최소 북한 인구의 15%(144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전쟁 사망자 수 144만 명에다가 부상자 182(군인 226천 명, 민간인 1594천 명으로 1949년 북한 인구의 19%에 해당)을 더하면 북한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로 북한 농업 연구원 출신 이민복(1996년 월남 당시 39)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세 집에 한 명꼴로 전사자가 있을 정도로 한국전쟁의 피해가 컸다고 말한다. 1960년 중국에서 북한으로 귀국해 10년간 살다가 중국으로 다시 건너간 진명(가명)이란 조선족은 한국전쟁 때 17-18세의 청소년들까지 전쟁터에 나가 죽었기 때문에 1960년대 당시 북한에는 남자들이 가물에 콩 나듯 드물었다고 회고한다.

 

아마도 이 (한국)전쟁에서의 최대 희생자는 북한의 민중이라는 최장집 교수의 표현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한국전쟁으로 북한이 입은 손실이 남한보다 심각했던 것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한화룡, 4대 신화를 알면 북한이 보인다에서>

 

- 2012년 여름이었다. 그동안 나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해 주던 장로님을 중국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장로님은 그해부터 내가 김일성종합대학의 평양의학대학 재활의학과 교수로 부임했다는 소식을 들은 듯했다. ... 장로님은 내가 함경북도 나선이라는 지역에서 일할 때는 어려운 주민들을 돕는 일이니 그나마 괜찮지만, 평양에 가는 것은 아무리 병원과 학교를 돕는다고 해도 북한 정권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악의 소굴로 들어가는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 ... 나는 그분의 말씀을 잠잠히 듣고 나서 대답했다. “주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찾아오셨다고 말씀하시는데, 만약 저들이 죄인이라면 정말 주님이 꼭 필요하겠네요.”

 

이런 대화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우리 대화는 합치점을 찾지 못한 채 계속해서 겉돌았다. ... 장로님은 마침내 목소리를 높이며 애써 참고 있던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면서 젊은 윤 선생은 공산당이 내려와서 자기 삼촌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없지요? 만약에 그 광경을 목격했다면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는 걸 아실 거요! 앞으로 윤 선생이 평양에서 만날 이들은 사람이 아니오!”라고 언성을 높여 말했다.

 

나는 수년간 장로님을 만나 왔지만, 이토록 격앙된 모습은 보지 못했다. 나는 그날 장로님과의 대화에서 처음으로 전쟁 세대들이 가진,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보았다. ... 나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장로님께 사죄를 드렸다. 그것은 그동안 전쟁의 아픔을 겪은 세대들의 마음과 생각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사죄였다. 그리고 장로님께 한 가지를 약속했다. 내가 다시 북한에 들어가게 되면, 한국 어른들이 왜 북한 사람을 그토록 싫어하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이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 거의 보름 동안 심한 몸살을 앓았다. ... 그리고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한국 교회 곳곳을 다니며 북한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해 왔는데, 어떤 이들에겐 그 말이 비수가 되어 상처 난 가슴에 또 한 번 상처를 냈을 수도 있었겠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대한민국의 어른 세대들, 전쟁 세대들의 아픔을 북한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평양에 돌아온 뒤에 나는 기회만 되면 그날 장로님과 나눈 이야기를 그곳 사람들에게 전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이런 남한 사람들의 마음을 나눌 때,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이었다. 나는 솔직히 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줄 알았다. 그런데 누구 하나 따지거나 분노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다들 숙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 주었다. 그 모습에 내가 더 놀라곤 했다. ...

 

... 내가 대한민국 전쟁 세대의 아픔을 듣고 나니 그전에는 세뇌 교육을 통해 증오만 가르친다고 여겼던 북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조금씩 다른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북한에서 있었던 전쟁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남한에서만이 아니라 북한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던 사건이다. 이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은 양쪽 모두에게 생채기를 남겼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전쟁 동안 자행된 만행은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너무나 끔찍하고, 처참했다. 오히려 전쟁이라는 시대적 사건 속에서 양쪽에 미친 일반 사회적 피해로만 따져 본다면 미군이 동원한 현대적 무기 탓에 북한 쪽이 훨씬 더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지 모른다. ...

 

... 우리가 북한에서 할 일은 그곳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남한과 북한에 남아 있는 아픔들을 다 같이 치유해 나가는 것이었다. 상대를 이해하면 분노는 반으로 줄어든다. ...

 

북한에는 대여섯 살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마다 미군이 총칼로 어린이나 임산부를 죽이는 모습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 미국인 아내가 북한 유치원에 그려져 있던 그 벽화를 보고 난 뒤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아내는 우리가 만났던 북한 사람들에게 미국인으로서 대신 용서를 구했다. 그들은 그런 아내의 손을 붙잡고 한참이나 같이 울어 주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거창한 통일이라는 이름 대신 서로의 마음을 먼저 알아주기를 말이다. ...

 

<윤상혁, 사랑으로 길을 내다에서>

 

- ... 남과 북이 서로의 아픔을 먼저 들여다보고 보듬어주는 날을 주시길 소망합니다.

 

<사랑으로 길을 내다의 추천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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