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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CLeaF) 59호 삼위일체 교리 사용설명서 (1)

기독법률가회 0 1031

                  CLF 클립(CLeaF) 59    

  

삼위일체 교리 사용설명서 (1)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성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약성서에는 예수와 하느님을 아들과 아버지로 표현하는 구절이 있고 둘을 하나로 보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성령까지 포함해서 서로 동일한 하느님임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있다. 그럼에도 삼위일체는 교회의 작품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정립하는 과정에 생산된 신학적 사변의 결과인 것이다. 그 안에는 초대 교회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인간관과 세계관 그리고 구원관이 반영되어 있다. ...

신이 살아 있는 인격적 존재임을 표시하고자 하는 용어가 삼위이다. 그래서 페르소나(persona) 곧 오늘날 인격체를 표현하는 말을 사용해서 삼위를 표현하고자 한다. 플라톤이나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초월자를 가리켜 하나라고는 하지만, 세 인격을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인격 대신에 위격이라고 번역해서 쓴다. 이중인격 또는 삼중인격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삼위라는 말을 통해 세 인격을 가진 신을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이 그리스의 이념과 달리 매우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 인문주의에 비해 인간의 죄를 더 심각하게 보고, 따라서 하느님은 매우 초월적 존재가 된다. 세상의 타락이 크다고 보면 순수한 선인 하느님은 그만큼 세상과 거리를 두는 초월자가 된다. 그런데 하느님이 그처럼 매우 초월적 존재가 된 이후에 발생하는 문제는, 어떻게 초월적 신이 내재하느냐는 것이다. 내재를 말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신이 된다. 초월자는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월자의 내재란 그 초월성 다시 말하면 순수성을 상실할 위기를 수반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신은 그 안에 세상과 만나는 접촉점을 설정해야 했다. 그것이 삼위의 문제의식이다.

 

하느님은 한 분이지만, 그 안에 절대적 초월자로서의 지위와 함께 세상과 접촉하는 지위가 같이 들어 있어야 한다. 초월자의 모습은 성부(the Father聖父)이고세상과 접촉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성자(the Son聖子)와 성령(the Spirt聖靈)이다. 성서에 따르면 성자는 세상 창조에 관여하고(요한 14),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하느님이다. 이처럼 세상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에 하느님은 성자의 모습으로 일한다. 그리고 성령은 피조물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이다. 영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하느님이 성령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한 분 하느님 안에, 성부는 하늘에 있는 하느님으로서 초월자로서의 지위를 상징하고 있으며, 성자와 성령은 세상과 함께하고 구원하는 내재자로서의 지위를 상징하고 있다. ...

 

초대 교회는, 하늘의 하느님이 이 땅에 와서 인간과 함께한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이해하는 과정에 삼위일체를 고백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는 절대 초월의 하느님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온 하느님을 모순 없이 일치시키기 위해 고백하는 교리이다. 하늘의 초월적 하느님은 그전에도 믿었는데, 인간 앞에 나타난 나사렛 예수에게 신성(神性)을 인정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일단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고백한 후에, 하늘의 하느님과 역사적 예수를 다른 존재로 보면, 하느님이 둘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늘의 하느님의 신성을 유일신 신앙 안에서 설명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 삼위일체 교리이. 그러기 위해, 두 분은 서로 다르면서 같은 분이라고 고백해야 했다. 성령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서로 다르다는 것이 세 인격 또는 세 위격으로 설명된 것이고, 서로 같다는 것은 한 분 하느님이라고 표현된 것이다. 이런 논리적 모순을 가리켜 아퀴나스는 인간 인식의 한계라고 보기도 하고, 초월적 진리의 신비로 이해하기도 한다. 인식의 한계 안에서 유비를 이용해 최대한도로 설명하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이다. ...

 

- 양명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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