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소식 > CLeaF
CLeaF

클립(CLeaF) 65호 한국 교회, 인문주의에서 배운다

기독법률가회 0 773

                      CLF 클립(CLeaF) 65


  

한국 교회, 인문주의에서 배운다

 

* 매달 연재되던 시온이네 집 이야기는 필자 사정으로 한 회 쉬어갑니다.

 

종교는 인문주의와 함께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힘에 대한 숭배가 되기 십상이다. 한국 교회는 인문주의적인 토대가 약하다. 심지어 인문주의를 배척하는 경향마저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자기반성을 하지 못하고, 단순하고 똑같은 언어만 반복하면서 사람을 위협한다. 물론 신앙과 인문주의 사이에는 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인간의 정신세계에 이바지하는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지 못하면, 화려한 겉모습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결국 무너지고 사라질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힘 숭배는, 지난 세월 우리 민족이 겪은 식민지배와 6·25 전쟁에서 생긴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20세기의 한국인들은 힘이 없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런 상처의 덕으로 한국인들은 자신을 보호할 전능한 신을 바라고 두려워하며, 교회는 아직도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되어 갈수록 힘 숭배의 종교는 힘을 잃을 것이다. 힘을 숭배하는 신앙은 도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신앙의 신은 모든 성공을 보장하고 정당화해 주는 존재가 된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외치며 성공신화를 비신화화하려고 했는데, 한국 교회는 인간의 성공 욕망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추겨서 결국 성공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를 만들고 있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미신적 종교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미신(迷信)이란참된 믿음을 혼미하게 하는 종교라는 말이다.

 

기독교 초기의 교부들은 기독교가 미신이 아님을 강조했다. 미신이 세속적인 힘의 종교라면, 기독교는 초월적이면서 선한 신에 대한 믿음을 내세웠다. 물론 기독교의 하나님은 전능한 존재이지만 힘의 개념과 선()의 개념이 충돌하는 신정론의 역사에서 기독교는 선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옹호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넘어온 현상도 신() 개념의 중심이 전능에서 사랑으로 이동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능해 보이는 십자가의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었던 것은기독교의 신 개념에서 전능보다 선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독교의 종교성에는 인문주의적 문제의식이 처음부터 들어 있었다. 인문주의적 문제의식이란, 인간의 주체의식과 도덕적 책임의식을 가리킨다. 플라톤과 공맹은 모두 종교를 윤리로 바꾸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간의 선한 양심의 힘으로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패권주의보다는 마음의 덕으로 세상을 구원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음의 변화와 자기 수양을 강조했다. 근대에는 칸트가 종교를 윤리로 바꾸려고 한 대표적인 인문주의자이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인문주의와는 출발과 끝이 다르다. 희망의 근거가 다르다. 그러나 인문주의와 별개가 아니라 인문주의를 품고 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인문주의의 사고방식을 잘 알고 있었고, 인문주의를 존중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철학의 언어를 많이 가져왔고, 중세의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많이 가져왔다. 진리를 사유하는 방식의 상당 부분을 인문주의에서 가져왔다. 두 사람이 개신교와 가톨릭을 대표하는 신학자임을 생각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인문주의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는 기독교가 언제나 인문주의를 대화의 상대요 동반자로 삼았음을 알려준다. 종교 개혁자인 루터와 칼뱅도 당시의 인문주의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기독교인들이 꼭 철학을 알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독교 신앙 안에는 보편적 진리와 자기 수양에 대한 고민이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고민 안 해도 될 만큼 삶과 역사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초대교회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신학이 나온 까닭은, 인문주의와 사회과학의 문제의식을 신앙의 문제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설교자들의 설교에는 그런 고민이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설교를 어렵게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쉬운 말이라도 그 속에 역사의 모호성에 대한 고민과 자기 수양의 언어가 들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복음이 말하는 해방의 기쁜 소식은 그 가벼움과 추상성에서 벗어나고,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정신을 제공할 것이다.

 

양명수, 한국 교회, 인문주의에서 배운다들어가는 말에서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