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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CLeaF) 71호 고난의 신비와 정의의 물음

기독법률가회 0 622

                       CLF 클립(CLeaF) 71   

 

고난의 신비와 정의의 물음 

 

 

... 우리는 고난이 없기를 기도하며 산다. 고난은 언제나 ‘뜻밖’의 일이지 않은가. 내 뜻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므로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난의 신비가 있다. 고난의 상처가 만든 그늘은 가벼움을 떨쳐 버리게 하는 것 같다. 깊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은 무게 중심이 밑에 있어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밑바닥의 체험은 사람을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하는 모양이다. 땅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어쩌면 땅바닥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피하고만 싶은 것 속에서 문득 나를 만나고 하나님을 대면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고난의 신비가 아닐까? 

 

그러나 고난은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고난은 결코 선이 아니요, 없을수록 좋은 것이다. 고난을 통해 믿음이 강해진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 

 

... 고난은 정의의 문제를 물고 온다. 고난이 일으키는 정의의 문제는 우주의 기초를 뒤흔든다. 하나님에 대한 물음과 도전으로 몰고 간다. ... 

 

... 욥은 끝까지 믿음의 사람이었나? 만일 믿음이라는 것이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주어진 하나님 담론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라면, 욥은 결코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 욥은 친구들의 담론, 곧 전통적인 신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기서 고백되는 신을 거부했다. 말하자면 그는 사람의 고통 한가운데서 새로운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자신의 고통을 설명해 줄 분을 찾고 있었다. ... 

 

... 불행이 닥쳐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가?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사탄이 의인 욥을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한 강력한 시험대였다. 사탄은 의인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유혹한다. 그 유혹의 지렛대가 불행이다. 사람은 거듭되는 불행 속에서도 경건한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 대가 없는 믿음이란 가능한가? ... 

 

... 욥은 자기의 온전함을 지킨다. 신실함을 지킨다. 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음직한 사람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도 믿음직한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믿고 계시기 때문에 역사는 지속되는 것이다. 욥의 믿음직함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요청되는 것이다. ... 

 

... 고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요구한다. 그 요구와 절규 앞에서 세상은 흠칫 놀라 자기를 돌아본다. 그리하여 새로운 진리의 여명이 튼다.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저항이 기도의 성격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렇다. 저항과 절규는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은 그 절규를 들으신다. 그들의 절규를 들어 주신다. 그리하여 세상을 바꾸신다. ... 

 

... 말이란 무엇인가.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은 ‘할 말’이 많다. 말은 할 말을 하는 것이요, 할 말은 억압에서 생겨난다. 억압이 없고 사랑과 평화만 있는 곳에서는 말이 필요 없다. 억울한 자, 원통한 일을 당한 자, 욥이 말문을 연다. 억울한 일에서 생긴 무의미를 극복해 보려는 것이 말이다. 그러므로 욥의 말이 거의 울부짖음이었다 하더라도, 아직 말을 하고 있는 한 욥은 희망을 찾고 있는 것이다. ... 

 

... 어려움을 당해 자기를 가누기조차 힘들고 약해질 대로 약해진 사람 앞에서 설교가 위로가 될까? 아마, 하나님조차도 설교하려 들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께서도 설교는 넓은 데나 사람 많은 곳에서 하고, 병든 이들에게는 설교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고난을 진 인류에게 설교하기보다는 같이 계시려고 했고, 오히려 몸으로 말씀하셨다. ... 

 

... 모든 일이 다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뜻대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 뜻대로 안 되는 일이 발생하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수난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수난을 당하시면서까지 사람에게 희망을 두고 계시다. 그만큼 사람은 하나님의 희망이며, 사람의 자유는 그만큼 귀하다. ... 

 

...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보는 낙관주의가 약자들의 처지를 간과하는 경솔한 것일 수도 있...다. 세상의 인심이 얼마나 비정하고 세상이 악한지 철저하게 알고, 그 이후에도 사람을 믿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경솔한 낙관주의가 아니고 현실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정신이다. 그때에는 이미 사람 때문에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람을 믿어주는 것이다. ... 

 

... 우리는 욥기 대부분을 차지하는 격렬한 언어를 잊을 수 없다. 그러나 마지막에 입을 다물고 회개하는 욥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그 둘은 신앙의 두 축이다. 두 축의 긴장은 성서를 어떤 굳어 버린 하나의 해석에 파묻히지 않도록 한다. 정의와 신비의 공존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를 요구하고, 그런 점에서 욥기는 우리에게 영원히 열려 있는 책이다. 

 

- 양명수, 『욥이 말하다 - 고난의 신비와 신학 이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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